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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라이제이션은 왜 홀대(?)받나요?

Edii Kim 2023. 1. 22. 12:09

해외에서 국내로 이직하면서 개인사가 바빠 오랫동안 신경을 쓰지 못했던 이 변방의 작은 블로그에, 어느 분이 장문의 댓글로 질문을 남겨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이 직종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뼈 있는 질문이었기에, 긴 시간 생각해 보고 글을 작성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걸리고 말았습니다. (글을 남겨주신 jun 님에게 감사와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한 화면에 다 안들어감...

질문의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글로벌 시장이 중요해진 게임 시장에서, 로컬라이제이션의 중요성은 명확한데
왜 핵심인 로컬라이제이션 직종 자체는 홀대 받으며 페이가 전반적으로 낮은가.

 

일단 먼저 말씀드리자면, 어느 사안이 그렇듯, 이는 케바케, 사바사, 회바회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평균적으로' 따졌을 때 게임업계 전체에서 로컬라이제이션, QA, 서비스 분야가 페이가 낮은 축에 속하는 것이지, 반드시 낮은 페이를 받고 일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백하자면 제 개인의 경우에는 스스로 나쁘지는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는 대우가 다른 직군과 비교했을 때 매우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게임 번역은 누구나 할 수(는) 있다 - 입문 용이

게임 번역은 입문하기 매우 쉬운 직군입니다.

 

영-한 번역을 한다고 했을 때,
한국에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저 게임을 좋아하는 A 씨
vs
미국에서 대학에서 20년간 한국어를 전공하고 이번에 게임 번역에 입문하는 미국인 B 씨
둘 중에 하나를 신규 채용하라고 한다면,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경우 A 씨를 선택할 것입니다.

 

번역에서는 도착어의 자연스러움 때문에 원어민(이 경우 한국인인 A 씨)을 쓰는 것이 기본이며, 게임 업계 특성상 젊은 시각이 플러스 요인이 되며, 사회 초년생이기에 회사에서 지출해야 하는 연봉도 낮아집니다.

A 씨가 유려한 글쓰기 실력이나, 게임의 흐름을 파악하고 기번역을 참조하는 능력,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상하거나 창의적으로 이를 해결하는 능력 등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성장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는 미국인 B씨도 마찬가지잖아요?

번역은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일입니다.
갓 한글을 뗀 아이도 글을 쓸 수 있듯, 번역도 시작어와 도착어만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번역인지, 좋은 번역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요.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인 좋은 대학이나 시험 성적 등은(물론 중요하지만), 게임 번역에서는 최하순위 고려 대상입니다.
만약 A 씨가 개발자/디자이너/마케터 경력이 없는데도 해당 직군에 원서를 넣었다면 바로 탈락했겠지만, 게임 번역에서는 가성비가 매우 뛰어난 인재인 것입니다.
위의 케이스에서 A 씨를 선택하는 것은 채용 담당 입장에서는 해당 인력풀에서 최적의 선택을 한 것이며, 이러한 선택이 많아질수록 로컬라이제이션 직군의 평균적인 연봉이 낮아지게 됩니다.

이처럼, 게임 번역은 게임 업계의 타 직군과 비교했을 때 정말 아무나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평균적인 대우가 낮아지는 이유가 됩니다.
단순히 해당 언어를 할 줄 알거나, 그 나라에서 n년 동안 살다 왔다거나, 원어민이라는 이유로 채용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2.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평가 기준 애매

1번의 이유에서 "그럼 평가 기준을 높여 좋은 인재를 채용하고 평균 연봉을 올리면 되지 않을까"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컬라이제이션은 정형화된 평가 기준이 없으며, 이 때문에 대우를 객관적으로 산정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흔히 평가 기준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분석해 보자면,

 

1) 기본 - 문법, 일관성, 오역, 오타, 마감

문법과 일관성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일전에 소개드렸던 LISA 스코어를 통해 평가할 수 있습니다.

프리랜서 게임 번역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 (4) - 샘플 테스트 주의사항


하지만 이는 정말 기본 중에 기본을 지키고 있는지 평가하는 기준이며, 실제로 번역의 완성도가 어떠한가는 평가할 수 없습니다.

LISA 스코어는 번역 퀄리티 평가에 기초적인 데이터만 제공할 뿐이며, 이를 맹신하는 업체라면... 번역가 입장에서는 피해 가는 게 상책입니다.

영화 번역가 황석희 번역가님이 데드풀을 번역할 때 같은 비속어라도 국문에서는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를 섞어서 쓰셨고, 말장난도 사전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번역하셨는데, 이를 LISA 스코어에 대입하자면:
a) 일관성 없음
b)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오역
이라 판단되기에 FAIL 처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보았을 때 데드풀의 번역은 퀄리티가 높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요.

더군다나, 큰 번역회사들이나 CAT툴 제작 업체에서 밀고 있는 Machine Translation의 경우 문법과 일관성 문제에서는 인간처럼 실수도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글만 넣으면 바로 번역이 나오니 마감에 대한 압박도 없고요. 비용은 말할 필요도 없겠네요.

결국은 AI한테 그냥 번역을 맡기는 게 최고네요?

 

2) 퀄리티

위에서 언급하였듯, 번역은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일이며 어떠한 글이 좋은지 나쁜지는 취향의 영역이기 때문에, "글의 퀄리티"를 대우에 산정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이를 처우 문제에 연계하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도중에 해당 그림의 퀄리티가 높다는 등 낮다는 등을 평가할 수 없는 것처럼, 번역 또한 최종적인 결과물이 나왔을 때에만 평가가 가능하며, 이러한 평가 또한 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번역이 완성된 게임이 출시되어 시장의 평가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해당 게임의 로컬라이제이션 퀄리티에 대한 평가는 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거기에 더해 소비자들의 특성상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남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쁜 번역'에 대해서는 분석해 가며 남기지만,
'좋은 번역'에 대해서 그 정도의 수고를 쓰실 분이 있을까요?

따라서 시장에서 나온 피드백만을 가지고 평가를 하는 것 또한 이후 대우를 산정하기에 객관성이 부족합니다.

 

3) 번역은 번역일 뿐

로컬라이제이션은 게임 개발 전반에 얕고 넓게 걸쳐있습니다.

게임 번역가는 게임 텍스트 번역 외에 개발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문화적인 오류(기획, 인게임 UI, 아트 디자인 등) 및 해당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마케팅) 등을 공유하고, 해당 시장에서 가장 적합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게임 로컬라이제이션에 있어서 기본 소양이며 해당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됩니다.

하지만, 게임 번역가의 메인 업무는 어디까지나 번역이기 때문에, 이러한 업무를 주 평가 기준으로 삼기에는 애매합니다.
개발자나 디자이너, 마케터 등이 번역가에게 물어보지 않는 한 이슈를 파악하기 힘든 점도 있고요.

따라서 대부분의 회사 내 게임 번역을 평가하라고 하면 "텍스트 번역"이라는 한계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고, 1,2번의 이유로 이를 평가하는 제대로 된 기준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인원이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는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어차피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 = 어떻게든 굴러만 가고 문제가 생기지만 않으면 오케이 = 중요하지 않은 업무"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게임사가 자신이 퀄리티 체크를 할 수 없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퀄리티 리스크가 높은 로컬라이제이션에 대해 큰 비용을 지출하는 것을 꺼려하게 됩니다.

 

 

3. 있어야 하지만, 없으면 안 되는 건 아님 - 서포터의 한계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 로컬라이제이션은 필수이지만 게임의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게임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플레이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만, 번역이 잘되었다고 해서 플레이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죠.

"안한글 안 해요"는 있지만, "한글 해요"는 없잖아요?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언어의 압박이 있다면 시작조차 안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글로벌 시장을 노리고 있다면 게임 번역이 필수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조차도 만약 게임이 중국어로만 나온다면 아예 시작할 생각조차 안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기본적으로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입니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가 그러했듯, 게임이 주는 재미가 해당 시장의 게이머들에게 들어맞는다면 게임이 어떤 언어로 되어있는가는 2차적인 문제입니다.

재미만 있다면 언어는 중요하지 않아요의 예시

 

따라서 로컬라이제이션은 시작 플레이어풀을 넓히는 데에 큰 역할을 하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신 서비스 중간에 해당 언어를 서비스하지 않는다면 그 언어로 플레이하던 인원들이 다 이탈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지만요.

따라서 로컬라이제이션은 시작할 때 리스크가 상당한 편입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가며 지속적으로 비용이 발생하는 반면에 게임이 해당 시장에서 그만큼 성공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축적되지만 그렇다고 빼버릴 수도 없는 계륵이 될 수 있거든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로컬라이제이션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개발사 입장에서는 큰 비용을 쓰고 싶지는 않은 이상한 위치에 서있습니다.

하지만, 로컬라이제이션은 게임 개발의 끝이면서 게임 플레이의 시작점입니다.

 

게임과 플레이어를 연결하는 제1 다리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저는 이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좋은 번역을 게이머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성장하고자 합니다.

 

<로컬라이제이션 평균 페이가 낮은 이유 요약>
1. 입문 용이
2. 평가기준 애매
3. 게임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