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 공방

[번역 잡담] 한리시타 '오역'사태 - 게임 번역가의 시점 본문

게임 번역/게임 번역 잡담

[번역 잡담] 한리시타 '오역'사태 - 게임 번역가의 시점

Edii Kim 2019. 9. 10. 12:18
참고: 필자는 본 글의 주요 주제인 '아이돌 마스터 밀리언 라이브! 시어터 데이즈' 및 해당 시리즈를 플레이한 적이 없고, 2D 아이돌 게임으로 분류되는 장르 또한 단 한 번도 플레이한 적이 없으며, 해당 서브컬쳐에 대해 일반인 수준의 지식만 가졌음을 먼저 밝힙니다. 본 글은 어디까지나 '게임 현지화 전문가'의 입장에서 2019년 7월 당시 불거진 '한리시타 오역 사태'을 통해 본인이 느낀 점을 서술한 것이며, 해당 사태에 관해 다른 의견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필자는 영한 번역을 전문으로 하고 있기에, 해당 게임의 원문인 일본어에 대해 깊은 이해는 없음을 밝힙니다.



게임 번역 역사에 길이 남을 나쁜 번역

 

게임 현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원문으로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와 현지화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게임 오역', '발번역'으로 검색하면 반드시 나오는 '힘세고 강한 아침'의 왈도체와 '유적이 우리 가족이 되었다.'의 다키스트 던전 오역 사태는 나쁜 번역이죠.

번역자가 (어떤 이유에서든) 소스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현지화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이 원문과 동일하거나 그에 가까운 경험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난 7월에 접한 '한리시타 오역 사태'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정리글을 읽어봐도 처음엔 특정 항목을 제외하곤 이렇게까지 시끄러울 이유가 있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맞춤법도 틀린 게 없고, 텍스트도 한눈에 이해가 가며, 텍스트 배치가 어색한 것도 아닙니다.

소스와 대조한 정리글을 읽어봐도 '언더 슬로우(쑻)' 등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오역'으로 볼 항목은 없었습니다.

상품으로써의 번역 퀄리티는 나쁘지 않게 뽑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한리시타가 현지화 과정에서 간과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소비자 니즈/타깃 소비자"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세븐나이츠 vs 아이마스: 둘 다 모바일 캐릭터 수집형 게임이지만, 주 소비자층이 다릅니다.

 

언급한 모모세 리오의 예시 외에도 실제 오역/오타 등이 있지만, 플레이어들이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이 바로 (플레이어가 느끼기에) '이유 없이 순화/검열된 번역'일 것입니다.

 

아이마스 시리즈 등의 게임은, 게임에서 흔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그래픽이나 스토리보다 '캐릭터성'에 중점을 둔 게임입니다.

그리고 이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층도 게임성이 좋아서 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와서', 또는 '최애캐와 연관된 세계관이라서' 플레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아무리 많은 캐릭터가 나와도, 기본적으로 '게임 플레이'와 '경쟁 구도'에 중심을 둔 다른 세븐나이츠 같은 수집형 모바일 게임과는 타깃 플레이어층의 행동 양상이 다른 것이죠.

 

소위 '애니메/오타쿠 게임'의 경우, 미디어 믹스를 통해 파생된 콘텐츠가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콘텐츠를 통해 캐릭터를 먼저 접한 뒤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가 많습니다.

게다가 애니메이션, 만화 등으로 해당 콘텐츠와 관련된 언어를 접해 어느 정도 일본어를 하는 '능력자'들이 많으며, 일본에 먼저 출시된 게임을 (단지 최애캐를 만나기 위해) 먼저 플레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본인이 생각하는 캐릭터와 어긋나는 부분을 귀신같이 캐치해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게임은 전적으로 캐릭터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문제가 된 번역들이 '나쁜 번역'은 아니라고 보지만, 확실히 번역 담당 개인의 판단에 의해 어느 정도 순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 그리고 이 부분을 플레이어들이 '오역'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죠.

 

위의 "오역"은 '얼굴'이 원문에 따라 '가슴'으로 도로 바뀌면서 어느정도 일단락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게임 번역가는 이러한 '오역 아닌 오역'에 대한 피드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기본적으로는 플레이어의 피드백에 따라서 수정하는 것이 정답입니다만... 현실의 일이 항상 그렇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것도 아니죠.

 

라이브 운영 중인 모바일 게임이라면, 이미 배포된 번역물의 단어 하나/설명 하나를 바꾸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번역가 마음대로 수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임 자체의 텍스트를 업데이트 이후에 수정한다면, 개발사 커뮤니티 게시글(홈페이지 및 FAQ) / 운영팀의 고객 응대 자료 / 구글&애플 스토어에 올라간 이미지 등 해당 텍스트가 사용되었던 관련 콘텐츠를 전부 맞춰서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위의 사례처럼 어감/말투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면, 기본적으로 번역은 한 사람이 담당하기에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따라서 해당 영역(위 예시의 경우에는 캐릭터 설명 문구)을 전부 다시 번역하거나 재검수해야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심각한 '오류'가 아닌 이상, 플레이어가 '잘못된 번역'이라고 받아들이는 문구가 수정되는 경우는 빈번히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관련 게임 시리즈를 전부 플레이하고 미디어 믹스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섭렵하는 등의 '덕력'이 높지 않은 이상, 위의 번역은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지극히 정상입니다.

따라서 사업적/업무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위의 사례는 '어차피 하는 사람만 하는 게임이고, 해당 피드백은 본 게임과 관련 없는 미디어 믹스를 통해 정립한 캐릭터성에 빠진 일부 하드코어 플레이어의 의견이며, 모든 플레이어가 일본어와 대조하면서 플레이하는 것은 아니니까 번역을 수정하지 않아도 무난'한 상황이죠.

 

하지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라면 이걸 그대로 둘 수 있을까?

 

한리시타 카페에 들어가 보니 어떤 분이 오역 리스트라면서 스크린샷을 수십 장 찍어서 원문과의 대조를 해주셨더군요.

그리고 글 말미에 번역에 대해 거친 말투로 비난을 남겨주셨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번역에 대해서까지 거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이런 플레이어라면, 해당 게임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크고 원문과 대조까지 하면서 플레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번역가로서 본인이 프로라는 이유로, 본인의 언어 실력이 더 낫다는 이유로 무조건 본인이 올바르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며 오만한 생각입니다.

 

또한, 게임 번역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게임을 현지 언어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게임 자체에 타깃 시장에 논란이 될만한 내용이 있다면, 이를 개발사에 피드백을 주는 것으로 해결해야 하지, 소스 텍스트를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본인의 역할을 뛰어넘는 월권행위입니다.

어떻게 보면 소스 텍스트를 작성한 원작자의 의도를 무시한 것이니까요.

 

'게임 번역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잘한다'에서 조금 더 나아가, '게임 번역은 그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잘한다'라는 점을 항상 생각하며 게임 번역에 임해야 합니다.

자신이 번역하는 게임에 애정이 클수록 좋은 번역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요.

게임 번역을 하면서 플레이어의 거친 피드백 때문에 마음이 꺾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플레이어를 같은 게임을 사랑하는 동료로 여기며 의견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이 이 일을 오랫동안 즐겁게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게임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번역할 게임을 사랑하는 '플레이어'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