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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잡담] A회사와의 면접 경험

Edii Kim 2020. 1. 12. 22:03

최근 우연히 매우 유명한 해외 개발사로부터 현지화 전문가로 이직 제의가 들어와 면접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조건이 맞지 않아 이직 자체는 하지 않았지만, 면접에서 나온 질문 몇 가지가 지금까지 게임 번역을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스스로 정리할 기회가 되었기에 살짝 공유하고자 합니다.

주의: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임을 감안하시길 바랍니다.

 

Q1. 게임의 현지화에서 본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게임에 적합한 수준의 현지화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텍스트만 번역할지, 음성도 현지화할지, 고유명사를 번역할지 아니면 음차할지, 게임 텍스트의 톤 또한 현지화할지(말투, 사투리 등) 등, 단순히 text to text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장르, 분위기, 플랫폼, 현지 게이머의 선호도에 따라 어느 수준까지 현지화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소위 '좋은 번역'이라 불리는 것도 여기서 출발하지요.

 

포켓몬의 경우, 이상해씨, 파이리, 꼬부기 등 등장하는 모든 포켓몬을 현지 사정에 맞춰 번역합니다.

고유 명사이기 때문에 일어 음차를 따라갈 수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주 타겟층이 어린이이기 때문에 보다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풀어서 번역한다는 기본 원칙을 세웠죠.

(그러다 보니 원문의 의미와 맞지 않거나 기존 번역과 다르게 번역하는 등 여러 문제가 생겼지만...)

 

밀리터리 FPS의 경우, 해당 게임의 시대상에 따라 말투와 용어 또한 번역해야 하지만, 이를 '완벽하게 한국 사정에 맞게' 번역했다면 너무 딱딱한 군대식 말투가 돼서 심각한 장면 되려 웃긴 장면이 되어버릴 수 있죠.

성우 더빙까지 되어있다면 더 그러할 거고요.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에서 소프가 프라이스 대위에게 '~하지 말입니다'라고 한다든지)

 

요즘 AAA 게임의 경우 음성 한글화가 되어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이머로 참 고맙기도 하지만, 음성 현지화가 되었다고 그것이 꼭 좋은 현지화인 것은 아닙니다.

최근 출시한 콜오브 듀티: 블랙 옵스 4의 경우, 음성까지 완전 한글화를 했지만, 번역 오류와 성우 연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랬다면 차라리 해당 장르의 한국 게이머들의 선호도가 낮은 음성 현지화를 제외하고 번역에 자원을 더 투자했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개발사의 사정과 시장에 따라 특정 수준까지의 현지화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Q2. 성우 더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성우 더빙은 텍스트 번역이 완료되어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현지화 단계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진행됩니다.

따라서 게임을 뽑아내기만 하는 개발사라면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못해 어색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죠.

더빙 음성은 텍스트보다 게이머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요소이기 때문에, 음성이 텍스트와 맞지 않거나, 성우의 연기가 상황이나 캐릭터에 맞지 않는다면 오역이나 오탈자보다 더 심각하게 게임의 몰입에 방해가 됩니다.

 

그냥 안 하는 게 나은 예시: 검은 삼국

 

또한, 성우의 연기가 아무리 좋더라도 해당 성우가 이전 작품들에서 연기했던 캐릭터의 이미지를 떨치지 못하거나, 혹은 연기 지도가 부족하여 해당 게임의 분위기에 맞지 않은 연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토탈워: 삼국의 유비 역을 맡으신, 최한 성우님. 완벽에 가까운 연기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타 2의 짐 레이너가 너무 인상 깊어서 자꾸 떠오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bcxbaABv_IQ

 

게다가 한국 시장은 영화/드라마 때문에 영문 음성에 한글 자막이 익숙하기 때문에, 한글 더빙이 있더라도 영문 음성/한글 자막으로 플레이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더빙 한글화가 된다면 게이머로서는 너무나 좋지만,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다른 곳에 자원을 투자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Q3. 소위 '블리자드식 현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의 게이머이며, 게임 번역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블리자드식 한글화'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현지화는 당시 게임 번역에 있어 획기적이었습니다.

기존의 '게임 번역'은 큰 고민 없이 스킬 및 지역을 음차해왔으며, 이에 익숙해진 일반 게이머들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완전 현지화'를 달갑지 않아 했습니다.

이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크게 성공하면서 블리자드 현지화 팀의 현지화에 대한 접근 방식이 게임 번역에 있어 일종의 기준이 되었죠.

하지만 '블리자드식 현지화'가 모든 게임에 있어 정답은 아닙니다.

 

2019년 하반기에 이미 해외에서 10년 넘게 서비스한 '이브 온라인'의 한국어판이 출시됩니다.

지금까지 한국어로 서비스되지 않았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한국 플레이어들이 언어의 장벽을 뚫고 플레이하며 애타게 한글화를 기대해왔습니다.

그런데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번역 시에 아이템/팩션(진영) 등의 고유 명사를 완역하지 말고, 음차하거나 차라리 영문으로 두라라는 의견이 대다수입니다.

정말 블리자드식 현지화가 좋은 거라면, 이들은 왜 완역에 반대하는 것일까요?

 

아이슬란드의 개발사 CCP의 EVE Online. 2003년 출시 이래, 언어와 시스템의 높은 진입 장벽으로 '온라인 게임의 무덤'이라 불렸다.

 

이브 온라인은 전 세계 단일 서버로, 한국 사람들만 플레이하는 것이 아닌, 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함께 플레이합니다.

따라서 아이템, 지리, 진영, 함선 등 전 세계 플레이어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플레이어 간 거래와 원활한 게임 플레이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블리자드식으로 모든 고유명사까지 완역한다면, 한국 플레이어들이 읽기에는 편하지만 플레이어 간에 용어를 공유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플레이어 자신들이 판단한 것입니다.

만약 고유명사는 번역하지 않고 영문으로 둔다면, 영문과 국문이 한 문장에 섞여서 나올 수도 있기에 보기에는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Cosmetic Issue'보다 MMO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이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더 우려합니다.

블리자드식의 현지화는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자원이 들어갑니다.

모든 개발사가 그정도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게임에 그 정도의 번역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장르와 상황에 따라 이브 온라인의 상황처럼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위에 작성한 글 외에도 현지화에 대해 여러 문답을 주고받았으나, 본인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세 가지 질문과 제 답변을 요약했습니다.

정말 기분 좋은 면접이었으며, 이번 면접을 통해 스스로 추구하고 있는 게임 번역이 조금 정리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게임 번역 지망생분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위의 답변들이 절대로 정답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