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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번역 공방
런던 스튜디오와의 협업이 시작되자마자 제가 마주한 가장 큰 물리적 장벽은 바로 '시차'였습니다.서울의 퇴근 시간이 런던의 업무 시작 시간이 되는 탓에, 녹음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새벽까지 모니터 앞을 지켜야 했습니다.하지만 주어진 3개월이라는 시한폭탄 속에서, 녹음 때문에 낮 업무인 번역과 리뷰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제가 설계한 '병렬 워크플로우'를 유지하기 위해, 새벽에는 녹음 디렉팅을 하고 낮에는 번역 상태를 조율하며 텍스트를 검수하는 강행군이 이어졌습니다.이번 녹음의 핵심은 "번역은 기획자의 작품을 현지 시장에 맞게 전달하는 과정"이라는 저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이를 위해 대부분의 녹음 일정에 스토리 작가님을 모시고 함께 디렉팅에 참여했습니다.캐릭터의 숨겨진 서사와 앞으로 전개될 복..
결단은 빠르게, 실행은 병렬로사장님의 "내일부터 당장 알아보죠!"라는 벼락같은 선언이 떨어진 뒤, 제게 남겨진 시간은 단 3개월이었습니다.물리적 타임라인을 맞추기 위해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함께 완수할 최적의 파트너를 찾는 것이었습니다.가장 먼저 현재 우리와 손을 맞추고 있는 네트워크들을 샅샅이 뒤졌습니다.국문 녹음을 담당하던 한국 업체는 영어 대응이 일정 상 불가능했고, 다국어 번역을 맡고 있는 글로벌 파트너사는 LA 기반의 자회사 스튜디오들을 후보로 제안했습니다.워크플로우 상으로서는 다국어 번역과 함께 성우 녹음도 진행하는 것이 수월했으나, LA 스튜디오의 견적서를 받아 든 순간, 저는 냉혹한 숫자의 현실과 마주했습니다.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인 SAG-AFTRA..
개발 일정 때문에 오픈이 밀리는 거야 게임 업계에서는 흔하디흔한 일입니다.그렇다면 그 유예된 시간 동안 로컬라이제이션은 숨을 돌릴 수 있을까요? 당연하게도 그 공백을 채울 더 많은 일과 새로운 스펙이 밀려 들어옵니다. 어느 늦은 밤, 여느 때처럼 모니터를 노려보며 쌓여있는 텍스트를 리뷰하고 있던 제게 사장님이 찾아왔습니다.평소 사적으로 말을 길게 섞을 일은 별로 없는 분이었기에, 그저 야근하는 직원이 보여 심심해서 말을 걸러 오셨나 했습니다. "XX 님, 개발 일정 문제로 출시가 2~3개월 정도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순간 마음속으로 안도감이 스쳤습니다.조금 더 퀄리티업을 할 시간도 벌었고, 추가되는 스펙에도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잠깐의 침묵이 흐르더니, 사장님이 뜬금없는..
'사람'이라는 블랙홀을 만나다기획팀과의 공조를 통해 견고한 '그릇'을 만들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그 워크플로우 위에서 함께 '문장의 맛'을 고민할 동료가 필요했습니다.특히 북미 시장을 정조준했던 프로젝트 특성상, 북미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저에게는 북미 시장에 대해 몸소 체득한 문화 감수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요.그렇게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거쳐 현지 문화적 감수성이 몸에 배어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신입 사원을 채용했습니다.면접 당시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겠다"며 반짝이던 그 뜨거운 열정은, 제가 공들여 닦아놓은 시스템의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보였습니다.'이 파이프라인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제 나도 매일 밤 별을 보며 퇴근하는 대신 인간다운 저녁을 맞이하겠구나' 하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
프로젝트에 합류하자마자, 한 신입 기획자분이 친절하게 다가와 업무를 안내해 주었습니다.해외 시장을 노리고 있는 프로젝트 특성상, 디렉터님이 특별히 번역에 신경 쓰기 위해서 최대한 기획에서 도와주기 위해 전담으로 붙이셨다고 했습니다.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분이 스토리 집필과 (본인은 몰랐겠지만)로컬라이제이션 PM 업무를 겸하고 있더군요. 번역할 텍스트 취합해서 넘기기,번역 결과물 데이터 시트에 넣기,로컬라이제이션 팀 문의 대응하기…아, 물론 본업인 스토리 집필도 하면서. 마음은 너무 감사했으나, 이는 로컬라이제이션 체계가 없는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비효율이었습니다.이런 구조는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 코스트만 발생시킵니다.로컬라이제이션 담당자가 옆자리 담당 기획자에게 물어보면 1초 만에 끝..
설계도를 그리는 설렘도 잠시, 제 앞에는 냉혹한 숫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산발된 인게임 텍스트는 한 눈에 보기에도 분량은 방대했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죠.일단 기획팀에서 정리한 텍스트 데이터 시트를 띄워놓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습니다.스토리 텍스트: 약 15만 자+UI 텍스트: 약 20만 자+총 분량: 35만 자+출시 언어: 6개 언어 (한/영/프/이/독/스)가용 인력: 내부 1명(나), 한-영 외주 프리랜서, 영-다국어 번역 업체일정: 8월 초 착수 → 12월 내 출시 (LQA 및 버퍼 제외 시 실질 작업 기간 약 3개월) 보통 번역 업계에서 숙련된 번역가의 하루 평균 작업량을 6,000자(검수 제외)로 잡습니다산술적으로는 6,000자 × 5일 × 4주 × 3개월 = 360,000자이니 물리적으로..
코로나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의 게임 개발사로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첫 출근을 하고 담당 프로젝트를 안내받았을 때, 그동안 번역과 LQA의 실무만 담당하던 저는 무척이나 막막하였습니다.비슷한 시기에 같은 회사로 이직해 오는 것으로 알았던 PM이 입사를 고사하게 되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유일한 현지화 전문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주일 먼저 오신 동료분이 계셨지만, 담당하시는 프로젝트와 그동안의 커리어의 궤적이 달라 실질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로컬라이제이션 기틀을 잡는 일은 오롯이 제 몫이 되었습니다. 글로벌 런칭이라는 큰 목표를 앞두고, "내부에서 영어 현지화 전문가가 있어야할 것 같다"라는 생각에 저를 채용한 것이지만, 현장 상황은 꽤 생경했습니다.업력이 길지 ..
본 글은 '게임 개발사 내부의 현지화 부서'에 한정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게임 번역 작업은 일단 게임 제작을 완료(혹은 어느 정도 완성)한 뒤에 이를 여러 언어로 옮기는, 제작과는 별개인 하나의 '번역 프로젝트'로 간주되어 왔습니다.일견 당연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일을 진행하기 위해, 기업에서는 번역가나 이를 관리할 현지화 매니저(PM)를 고용합니다. 하지만 현지화 실무자들은 '제작자들은 개발에 집중하고, 이후 번역 프로젝트를 별도로 관리'하는 방식은 결국 원문과 다국어 결과물의 퀄리티 차이, 즉 언어적 불평등을 초래하며, 이는 글로벌 시장 진출에 있어 확연히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이 때문에 회사 내부의 현지화 매니저들은 제작 이후 번역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