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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잡담] 게임 번역가로서 팬 한글화 참여에 대한 생각

Edii Kim 2019. 2. 13. 18:31
주의: 본 글은 개인적인 열정과 팬심으로 한글화를 진행하는 많은 분을 나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먼저 밝힙니다. 해당 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프로로서 게임 번역가'를 지망하는 분들에게 생각할만한 주제를 던지고자 함이며, 모든 팬 한글화 과정을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 글의 내용은 극히 주관적인 견해 및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게임 번역가 지망생 및 한글화 팀에 통용되지 않음을 먼저 밝힙니다.

 

'팬 한글화'는 게임을 개발한 개발사, 현직 게임 전문 번역가, 그리고 게이머 모두에게 민감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개발사는 자사의 게임의 동의 없이 변경하는 것으로 보거나 홍보/판매 촉진이 된다는 이중적인 입장이,

번역가는 시장이 작아진다고 보거나 덕분에 한국 게임 번역 시장 자체가 넓어질 수 있다는 이중적인 입장이,

게이머로서는 복돌이 문제 때문에 정식 한글화 게임이 감소한다는 입장과 정식 출시되지 않은 게임을 한글로 즐길 수 있어 좋다는 이중적인 입장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팬 한글화'는 게임 에뮬레이터만큼, 어쩌면 그보다 회색지대에 속한 영역입니다.

 

본 블로그를 개설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공지에서 밝혔듯이, 한 명의 게이머로서 게임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번역가가 많아져 한글화 퀄리티가 높은 게임이 많아졌으면 하는 극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공지 사항] - 블로그 안내

 

'현직 게임 번역가'로서 '게임 번역가 지망생'에게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만약 본인이 프로 게임 번역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팬 한글화에 너무 깊게 몸담는 것은 지양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잘하는 건 공짜로 해주지 말아야지

 

게임을 번역하고 싶다는 여러분의 열정을 노려 단가를 후려치는 악덕 업체보다 더 나쁜 건, 그 열정을 공짜로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팬 한글화는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당장은 누군가에게 금전적인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화 불법 스캔본 번역 사이트인 '마루마루'의 선례를 생각해보면 누가 부당한 이익을 가져가는지 이해하기 쉽습니다.

한국에서 정식 루트를 통해 출판되지 않은 일본 만화를 취미로 번역하여 개인 블로그에 게시하는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만화책을 스캔해 인터넷에 게시하는 것은 분명 불법이지만, 이분들은 영리를 추구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이러한 작업물을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불펌하여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마루마루 같은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점차 큰 문제로 발전합니다. 

개인의 취미에서 시작했던 번역 작업이,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불법 여부는 제쳐두고) 게임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번역본을 작업한 번역가보다 불법 사이트의 운영자가 이익 대부분을 가져가죠.

 

이러한 예시 말고도, 팬 한글화의 궁극적인 목표인 '팬 한글화 패치의 공식 한글화로의 도입'이 고려될 때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팬 한글화는 몇몇 1인 번역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다수의 익명 번역/검수자가 참가하며, 계약 관계가 아닌 자원봉사 개념이기 때문에 번역물(게임 자체가 아닌)의 저작권이 다수에게 분산됩니다.

그중에서 그나마 팬 한글화 패치의 저작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팬 한글화를 주도한 사람이며, 이러한 '총대'가 개발사에 연락해 공식 한글화를 추진하기 때문에 개발사는 이 '총대'를 번역물의 저작권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핫산질을 한 대다수 번역가들은 팬 한글화 패치의 공식 패치 도입 과정에서는 잊힙니다.

 

또 하나, 근래에 팬 한글화 커뮤니티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매우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언더테일 이후 인디 게임의 팬 한글화가 부쩍 늘어났는데, 인디 게임사의 입장에서는 그저 팬들이 알아서 한글화를 해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커뮤니티에서 이 인디 게임 번역을 주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절대다수의 익명 번역가들이 좋은 일 한답시고 번역 자원봉사에 참여했는데, 그 포트폴리오는 총대 몇 명에게만 계속 쌓여가죠.

텍스트의 양이 적어 빠르게 결과물이 나오니 팬 패치 블로그에 가보면 주도자 1명이 1년에 2~30개의 게임의 번역한 것도 보입니다.

이러한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총대가 인디 게임 번역을 전문으로 한다는 회사를 차리기도 합니다.

인디 게임사는 자신의 게임이 공짜로 한글화가 되니 큰 반대가 없고, 절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한글 패치가 나오니 좋지만, 정작 실제로 번역한 인원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력서에 한 줄 넣을 수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팬 번역 경력은 눈길을 끌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합불 여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경력이니까요.

 

총대가 주도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다는 쪽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조별 활동에서 조장이 열심히 일한 조원들의 이름을 전부 빼고 본인 이름만 넣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유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조장이니까 제일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니까요.

 

위의 이유로, 만약 인디 개발사 분들이 이 글을 보게 되신다면 저는 '인디 게임 전문 번역 회사'는 피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해당 번역 업체에서 자체적으로 작업했는지, 아니면 팬 번역을 돈 받고 주도해 주는 것인지, Crowdin 같은 오픈소스를 사용해 번역을 한 건지, 개발사에서는 알 수 없으니까요.


 

자신이 프로 게임 번역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팬 번역에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않길 바랍니다.

팬 번역은 어디까지나 게임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만 이루어진, '취미'의 영역에서 머물러야만이 순수해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