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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번역/게임 번역 더 잘하기

게임을 번역할 때 생각해야 할 것들 (번역가 편 - 1)

Edii Kim 2020. 7. 23. 15:32

게임 번역은 다른 분야의 번역과는 그 근본부터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게임 번역이 더 어렵다거나 게임 번역이 번역의 꽃이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라, 번역할 대상이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분야와는 다른 특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종종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두지 않아 그 결과물이 참담한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게임을 번역할 때 염두에 둬야 할, 다른 번역 분야와는 다른 특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간까지 계산

번역가 입장에서 볼 때 게임 번역은 다른 번역 분야와 비교했을 때 들어가는 시간에 비해 나오는 결과물이 적은 분야입니다.

영상 번역에서는 영상을 보며 번역하고, 출판 번역은 출판물을 읽으면서 번역하기 때문에 번역할 대상 자체가 가이드라인이 되지만, 게임 번역은 게임을 '하면서' 번역해야 하기 때문에 게임 그 자체가 오히려 '번역'이라는 행위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개발자들은 당연히 번역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고 개발의 용이성을 위해 텍스트의 사용처에 따라 'Level' 같은 단어를 앞 뒤 문맥 없이 하나의 스트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Level'이라는 단어 하나를 번역한다고 했을 때, 상황에 따라 캐릭터의 레벨, 스테이지의 레벨, 게임의 장르에 따라 지면을 평탄화 하는 기능이나 지형의 높이를 자체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단어만 가지고는 그 사용처와 문맥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게임 번역가는 게임을 플레이해가며 해당 텍스트가 나오는 화면을 트리거해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이처럼 번역할 텍스트의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 게임을 플레이해야 하는데 시간이 걸리기에 단어 하나를 번역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다른 번역보다 상당히 많이 들어갑니다.

"Level"
"Available"
"Hit"
"Low"
가끔가다 '단어 몇 개만 번역해주세요'라며 단어 단위로 쪼개진 게임 텍스트 파일이 날아오는 경우, 일일이 어디에서 사용된 단어인지 확인하느라 하루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프리랜서에게는 보안 때문에 개발사 외부로 게임의 개발자 빌드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텍스트나 자료의 맥락에 대해 끊임없이 개발자와 PM에게 문의하고 답변을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게임을 번역할 때에는 이러한 소통에 드는 시간까지 계산해 마감을 생각해야 합니다.

 

 

2.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용어 지양

라이브 게임의 경우, 유저가 현재 진행 중인 사회적인 이슈와 관련해 번역 결과물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에 단어 선택에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페미니스트 용어나 일베 용어가 한창 사회적인 이슈였을 때 게임 내에서 사용된 단어 하나 때문에 게임 자체가 서비스를 종료하거나 직원이 교체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현지 시장에 맞춰 적절한 번역을 제공해야 하는 게임 번역가는 무조건 이러한 용어의 사용을 지양해야 하며,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와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 뉴스 등에서 사회적 현안에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나무 위키 - 쿵쾅이: "쿵쾅쿵쾅"이라는 단어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만약 덩치가 큰 여성형 캐릭터가 걷는 모습과 함께 표현되었다면...

 

원문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리는 용어라고 할지라도 만약 현재의 사회적인 이슈와 연관되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느낌을 죽이더라도 무난한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개발사/PM에게는 미리 충분한 설명을 전달해야 합니다.

 

 

3. 다른 번역가/검수자와 소통하며 말투와 용어 맞추기

게임 번역은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기존 번역의 톤이나 방식, 사용된 용어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 하더라도 이에 맞춰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한글화된 게임을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들이 '번역이 이상하다'라고 느끼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일관성 없는 번역"입니다.

애초에 번역된 게임을 자국의 언어로 플레이할 때 원문과 비교해가며 플레이하는 열정적인 플레이어는 많지 않으며, 홈페이지 콘텐츠, 마케팅 텍스트 등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부분 외에도 해당 톤이나 용어가 사용될 곳은 많이 있습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기존의 톤이나 용어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번역의 톤이 바뀌거나 용어가 변경된 경우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내가 원문을 얼마나 잘 옮겼는지, 내가 담당한 부분의 번역이 얼마나 뛰어난 지보다, 대사 하나, 단어 하나가 게임 전체의 흐름과 맞는지,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방해하지 않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기존 번역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오타를 발견한 경우, 코멘트를 남겨 PM에게 보내 수정을 요청해야지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에서 기존의 톤이나 용어를 변경하면 절대 안 됩니다.

 

 

4. 텍스트가 재활용될 수 있는 환경을 생각

기술적인 변수 Tag뿐만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게임 내에서 재활용될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하면서 번역해야 합니다.

LQA 단계에서 이러한 오류를 최대한 잡아내더라도, 일일이 수정하기 곤란할 정도로 변수가 많다면 전부 확인하지 못한 채 출시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번역할 때부터 이러한 변수를 염두에 두며 번역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삼국지 10: 인물과 아이템 변수가 많은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특히나 등장인물이 많으며 대사가 재활용될 수 있는 게임에서는 존댓말과 반말의 혼용을 지양하고 최대한 한쪽을 선택해 번역해야 합니다.

같은 텍스트라도 기기의 해상도와 같은 외부 요인에 따라서 문장의 줄바꿈이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텍스트라도 해당 텍스트가 사용되는 기능(캐릭터 창 vs 아이템 창)에 따라 그래픽 또는 문맥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해당 문제를 번역 단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면 개발사에 최대한 빨리 보고하는 쪽이 좋습니다.

게임 번역은 개발의 제일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5. 소통하며 개발사의 의도를 파악 - 번역가의 권한은 어디까지?

개발자들은 번역/언어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현지 시장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나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게임 텍스트에 재미를 주기 위해 말장난(pun)과 밈(meme)이 치덕치덕 발려있는 경우, 당연히 한국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유머이기에 그대로 번역하면 밋밋하고 재미없는 결과물이 나옵니다.

넷플릭스 보고 갈래...?

 

그런데 번역 전문가가 아닌 플레이어들이 이른바 "초월 번역"이라고 판단하는 부분은 대부분 말장난과 밈을 번역가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가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의미를 살리자니 재미가 줄어들고, 재미를 살리자니 개발자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의미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말장난과 밈은 게임 번역에서 가장 골치 아픈 영역 중 하나입니다.

 

또한, "블리자드가 그랬듯이 최대한 완역해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개발사도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러한 접근법이 오히려 플레이어의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발표 당시 부정적인 피드백이 많았던 "Gunsmith"의 번역. 완역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따라서 애초에 개발사와 소통하면서 텍스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도착어의 말장난이나 밈의 활용, 소스 텍스트와 반드시 같아야 하는지 등 번역가가 텍스트 현지화에 있어 어느 정도까지의 권한이 있는지를 확인받아야 합니다.

만약 임의로 소스와 동떨어진 번역을 했다면(transcreation), 반드시 그 이유를 코멘트에 명시하고 커펌을 받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번역가의 역할은 출발어를 도착어로 옮기는 것이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번역 잡담] 한리시타 '오역'사태 - 게임 번역가의 시점

 

2편에서 이어집니다.

[게임 번역/게임 번역 더 잘하기] - 게임을 번역할 때 생각해야 할 것들 (번역가 편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