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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회사 번역 일지 (3) - 기획자와 번역가의 동상이몽 깨기

Edii Kim 2026. 6. 1. 23:18

프로젝트에 합류하자마자, 한 신입 기획자분이 친절하게 다가와 업무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해외 시장을 노리고 있는 프로젝트 특성상, 디렉터님이 특별히 번역에 신경 쓰기 위해서 최대한 기획에서 도와주기 위해 전담으로 붙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분이 스토리 집필과 (본인은 몰랐겠지만)로컬라이제이션 PM 업무를 겸하고 있더군요.

 

번역할 텍스트 취합해서 넘기기,
번역 결과물 데이터 시트에 넣기,
로컬라이제이션 팀 문의 대응하기…
아, 물론 본업인 스토리 집필도 하면서.

 

마음은 너무 감사했으나, 이는 로컬라이제이션 체계가 없는 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비효율이었습니다.

이런 구조는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 코스트만 발생시킵니다.

로컬라이제이션 담당자가 옆자리 담당 기획자에게 물어보면 1초 만에 끝날 일을, 메신저와 메일을 오가며 핑퐁하느라 시간을 버리는 꼴이었죠.

로컬라이제이션 담당자 역시 큰 그림을 보지 못한 채 텍스트만 A 언어에서 B 언어로 옮기는 단순 LSP(번역 업체) 수준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이고요.

 

일정과 문제점, 그리고 논의할 내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서, 기획팀과의 로컬라이제이션 로컬라이제이션 킥오프 미팅을 열어 디렉터님을 포함해 모든 기획자에게 예상 일정과 기존에 가정했던 워크플로우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다음의 약속과 부탁을 전달하였습니다.


<약속>

1. 번역 일정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컬라이제이션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반드시 출시 전에 번역이 완료되어 나갈 것입니다.

2. 번역되어 나가는 콘텐츠들도 결국 개발진분들의 작품입니다. 번역은 기획자의 작품을 현지 시장에 맞게 전달하는 과정입니다. 절대 임의로 작업하지 않습니다.

3. 수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미안해하지 마세요. 다시 번역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빌드에 텍스트가 들어가서 돌아가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나중에 바꿀까 봐 주저하지 마세요.

4. 제작에만 집중하세요. 국문 오른쪽, 외국어로 들어간 모든 텍스트는 이제 로컬라이제이션이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부탁>

1. 우리는 한 팀입니다. 번역쟁이는 기획을 못 하고, 기획자는 번역을 못 하니, 모든 언어의 플레이어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 간극을 맞추고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이 많더라도 귀찮아하지 마시고, 참고 자료 등의 열람 권한을 아끼지 말아 주세요.

2. 한글 외 다른 언어를 임의로 리소스에 넣지 마세요.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표시될 필요가 있는 텍스트 리소스와 이미지 등은 반드시 로컬라이제이션 검수를 거쳐서 나가야 합니다. 이쯤은 뭐라는 생각에 넣은 그래픽 텍스트가 해당 시장의 플레이어들에게 조롱받거나 최악의 경우 출시 불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3. 기획팀의 데이터 시트에 ‘LOC 현황’ 드랍다운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꼭 모든 스트링에 적용해 주세요.
스트링 ID KO 메모 LOC 현황 EN 언어 추가 >>
      신규    
      수정    
      작업중    
      완료    
      테스트    
      삭제    
신규/수정: 기획자가 작업했거나 수정했을 때 표기.
작업중: 번역팀이 추출해 작업 중인 상태.
완료/테스트/삭제: 공정 관리용.

 

당연히 휴먼 에러가 있을 수 있기에, 텍스트 추출과 업로드 사이에 해당 스트링에 변화가 있었는지 분석하는 툴을 만들어 이중으로 체크하였습니다.

(기획자가 깜빡하고 'LOC 현황'을 업데이트 하지 않은 국문 스트링 수정 사항은 제가 슬쩍 '수정'으로 돌려서 다음 사이클에서 작업하였습니다.)


설득의 핵심: ‘잡무’가 아닌 ‘생산적 구조’로

처음에 몇몇 기획자분들은, 바쁘게 스트링 작업을 하면서 스트링 하나씩 드랍다운을 넣어야 하는 불필요한 작업이 하나 추가된 것 때문에 불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시니어 기획자분께서 이러한 워크플로우가 기획-로컬라이제이션에서 어찌 보면 가장 지엽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커뮤니케이션과 번역 일감 취합의 코스트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보셔서, 기획팀 내부적으로도 공감대를 형성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워크플로우 사이클이 돌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기획자들은 별도의 요청 없이도 번역이 차곡차곡 빌드에 쌓이는 것을 보며 신경쓸 것이 줄어 업무 부담이 줄어들었다며 만족해하기 시작했고, 출시까지 쭉 기획자분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바쁘게 번역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었습니다.

 

이번 설득이 먹혔던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기획자들에게 '더 해달라', '더 잘해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던 '기획의 일이 아닌 잡무의 늪'에서 어떻게 구원해 줄 것인가를 실리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기획자는 번역의 파이프라인이 자동화되는 것을 보며 불필요한 작업이 아닌 생산적인 구조임을 실감했고, 저는 그 신뢰를 바탕으로 품질을 관리할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시스템을 이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고 ‘우리는 결국 하나의 목표를 가진 팀’이라는 약속을 맺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이 시스템은 견고해졌고, 우리는 더 이상 불필요한 핑퐁에 에너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시스템이 사람의 노동을 줄여주어, 비로소 우리는 문장의 맛을 고민할 여유를 갖게 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