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 공방
게임 회사 번역 일지 (5) - 너의 목소리가 보여 (1) 본문
개발 일정 때문에 오픈이 밀리는 거야 게임 업계에서는 흔하디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유예된 시간 동안 로컬라이제이션은 숨을 돌릴 수 있을까요?
당연하게도 그 공백을 채울 더 많은 일과 새로운 스펙이 밀려 들어옵니다.
어느 늦은 밤, 여느 때처럼 모니터를 노려보며 쌓여있는 텍스트를 리뷰하고 있던 제게 사장님이 찾아왔습니다.
평소 사적으로 말을 길게 섞을 일은 별로 없는 분이었기에, 그저 야근하는 직원이 보여 심심해서 말을 걸러 오셨나 했습니다.
"XX 님, 개발 일정 문제로 출시가 2~3개월 정도 미뤄지게 되었습니다.
순간 마음속으로 안도감이 스쳤습니다.
조금 더 퀄리티업을 할 시간도 벌었고, 추가되는 스펙에도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이 흐르더니, 사장님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XX 님. 북미권 유저들은 영어 더빙(Voice Over)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북미 시장은 대부분 영어 음성을 기본 탑재하고 있어서, 유저들에게는 거의 당연한 요소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럼 애니메이션은요?"
"선호도에 따라 다릅니다. 시장 크기 자체는 더빙 버전이 훨씬 크고 메인스트림입니다. 자막판은 주로 원어 음성을 선호하는 하드코어 팬층이 소비하죠. 다만 이건 걸러 들으셔야 하는 게, 애초에 북미에서 애니메이션 자체가 비주류 시장인 데다가 자막판은 불법 스트리밍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결국 주 타겟층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선호도가 갈리는 문제입니다."
제 설명을 가만히 듣던 사장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메인스트림으로 올라가야 하니까, 영어 더빙을 넣는 건 어떨까요?"
그 순간 제 사고 회로는 잠시 정지되었습니다.
출시가 밀렸다고는 하지만, 오픈까지 고작 3개월 남은 시점이었습니다.
'더빙을? 갑자기? 이 시점에? 북미 시장 조사는 끝난 건가? 내 말 한마디만 듣고 이렇게 큰 결정을?'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할 수 있고 하고 싶긴 한데, 이 타이밍에 진짜 우리 게임에 영어 더빙이 필요한가에 대한 확신도 필요했습니다.
진정하고 조심스럽게 스코프(Scope)를 물었습니다.
"만약 진행하신다면... 분량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풀 더빙(Full Voice Over) 기준이요."
두 번째 뇌정지가 왔고, 이내 머릿속의 계산기가 광속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픈까지 3개월 남은 시점에서 캐릭터 대사가 있는 모든 텍스트를 녹음해야 한다면, 번역과 더빙을 동시에 병렬로 진행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중심이 되는 스토리 텍스트는 모두 번역이 완료된 상태였기에, 녹음 스케줄에 맞춰 남은 번역 일정을 세밀하게 조율하면 번역과 더빙의 병렬은 불가능하진 않아 보였습니다.
최종 사운드 리소스를 마무리하는 후반 작업에 한 달을 잡는다면, 실제 녹음은 3주, 누락되거나 수정된 대사를 따는 픽업 녹음은 1주 안에 끝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다음 주부터 준비 단계에 들어가 한 달 안에 성우 캐스팅과 기획을 끝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물리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님.
"물리적으로 타임라인을 맞출 수는 있습니다. 북미 시장을 진지하게 타겟팅하고 있다면 분명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저 역시 현지화 전문가로서 꼭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 뒤에 붙을 수많은 '하지만', 특히 '이 게임의 타겟층과 게임 자체의 규모를 봤을 때, 영어 더빙이 정말 필요한가?'를 꺼내기도 전에, 사장님이 제 말을 자르셨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시간이 부족할테니, 내일부터 당장 업체 알아보는 걸로 하죠. 화이팅!"
사장님은 유유히 자리로 걸어가셨고, 그렇게 단 몇 분 만의 벼락같은 회의(?)로 출시를 3개월 앞둔 게임의 영어 풀 더빙이 결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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