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 공방
게임 회사 번역 일지 (5) - 너의 목소리가 보여 (2) 본문
결단은 빠르게, 실행은 병렬로
사장님의 "내일부터 당장 알아보죠!"라는 벼락같은 선언이 떨어진 뒤, 제게 남겨진 시간은 단 3개월이었습니다.
물리적 타임라인을 맞추기 위해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함께 완수할 최적의 파트너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현재 우리와 손을 맞추고 있는 네트워크들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국문 녹음을 담당하던 한국 업체는 영어 대응이 일정 상 불가능했고, 다국어 번역을 맡고 있는 글로벌 파트너사는 LA 기반의 자회사 스튜디오들을 후보로 제안했습니다.
워크플로우 상으로서는 다국어 번역과 함께 성우 녹음도 진행하는 것이 수월했으나,
LA 스튜디오의 견적서를 받아 든 순간, 저는 냉혹한 숫자의 현실과 마주했습니다.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인 SAG-AFTRA(유니온) 가입 여부에 따른 복잡한 규정, 그리고 그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부대비용이 문제였습니다.
3개월이라는 촉박한 일정 속에서 성우의 연금과 건강보험료까지 챙기며 리스크를 안고 가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때 의외의 돌파구가 보였습니다.
일본 성우 녹음을 담당하던 일본 업체에서 자신들의 신뢰할 수 있는 협력사인 런던의 스튜디오를 소개해 준 것입니다.
런던은 비용 면에서 훨씬 합리적이었고, 무엇보다 성우들의 샘플이 우리 게임의 판타지적인 분위기와 정통 영국식 톤에 더없이 잘 어울렸습니다.
시간이 곧 비용이었기에, 업체 선정과 동시에 내부 작업도 병렬 워크플로우로 전환했습니다.
업체를 선정하는 동안, 저는 캐릭터 기획서를 번역하며 그들이 연기할 '캐릭터 시트'를 번역하며 캐스팅을 위한 기초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중, 선행으로 진행된 한국어 녹음파일 및 대본을 체크하며 이를 실제로 번역된 스토리 텍스트와 맞추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자료들을 기반으로 기존 번역본을 성우가 연기하기 가장 좋은 형태의 '영어 대본'을 업데이트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물론, 게임 텍스트들의 번역과 리뷰도 병행하면서요.
미리 정리한 워크플로우로 벌어두었던 시간이 여기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런던에서 날아온 1차 캐스팅 샘플들이 제 메일함을 채웠습니다.
"바빠요"
저는 이 샘플들을 전 팀에 공유해, 관련자들의 피드백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캐릭터들을 만들어낸 제작자들의 의견이 우선시 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요.
하지만 캐스팅을 확정해야하는 시간까지, 50여명되는 관련자들 중 피드백을 남겨준 분은 저를 포함해 3~4분 정도였습니다.
황망한 저에게 한 기획자분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영어를 모르고, 믿고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너무 바빠요."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함께 디렉팅을 담당할 스토리 작가님과 함께 1차 캐스팅을 확정했습니다.
캐스팅 확정과 동시에 런던 스튜디오에서는 성우님들의 스케줄 조율에 들어갔고, 곧 녹음 일정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구축한 파이프라인을 타고 흐르던 텍스트 데이터들이, 이제는 실제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동안 '빌드에 텍스트가 제대로 들어가는가'를 고민하던 저는, 이제 '이 문장이 성우의 입을 통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가'라는 새로운 차원의 품질 관리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밤낮이 바뀐 런던과의 실시간 디렉팅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엑셀 시트 안에서만 존재하던 캐릭터들이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한달 안에 제로에서 업체 선정과 캐스팅을 완료한다는 촉박한 일정이 실제로 이뤄지는 것을 보며, 이 무모해 보이던 도전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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