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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회사 번역 일지 (6) - 힘세고 강한 도구 (1)

Edii Kim 2026. 9. 5. 20:44

언젠가 세계적인 대기업의 로컬라이제이션 매니저 면접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수억 명의 유저를 거느린 그들이 여전히 구글 엑셀 시트 수십 개를 손으로 복사해 가며 번역 핑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습니다.

일반적인 외주 번역 업체(LSP)는 최상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겠지만, 감히 갑(클라이언트)에게 "선생님들, 워크플로우를 이따위로 짜시면 안 됩니다"라고 훈수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문제가 없다면 문제가 없다(If it ain't broke, don't fix it).

 

참 편리하고 매력적인 말입니다.

개발사, 퍼블리셔, 외주 번역 업체(LSP) 등 현지화 업계의 거대한 체인 속에서, 각자가 자신에게 할당된 좁은 범위의 업무만 사고 없이 처리한다면 아무런 표면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번역가는 번역만 하고, PM은 일정 조율만 하고, LQA 담당자는 버그 리포트만 쓰면 세상은 평화롭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문제의식 자체가 닿지 않는 이러한 관성 때문에, 전체 로컬라이제이션 워크플로우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시도는 시작조차 되지 못합니다.

이전 직무 담당자로부터 인계받은 프로세스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클라이언트와 실무자 모두에게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방식이니까요.

모두가 늘 그렇게 일해왔기에, 더 나은 기술이 세상에 널려 있어도 바꾸려 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런 도구가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 현지화 씬의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어느 업계에나 있는 현상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지화 쪽이 특히나 이러한 모습이 도드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 회사로 이직하기 전, 저는 운이 좋게도 해외의 거대 로컬라이제이션 전문 업체에서 글로벌 주요 클라이언트를 전담하는 한국어 링귀스트로 5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당시 팀에는 13개 언어의 전문가들이 모여 북적였지만, 한국은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 특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핵심 타겟이었고, 덕분에 저는 PM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클라이언트사의 로컬라이제이션 매니저가 벤더를 핸들링하는 방식,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공유 시트 설계, 그리고 CAT 툴의 극한의 세팅까지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며 저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던 것은 '번역 실무자가 오직 텍스트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조율된 정교한 워크플로우'였습니다.

번역가들이 흔히 겪는 태그 오류, 맥락 없는 단어 나열, 용어 불일치 등의 실무적인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솔루션은 이미 완벽하게 발전해 있었습니다.

워크플로우를 설계하는 관리자의 엔지니어링 역량에 따라 개발사, PM, 번역자, 그리고 후속 작업을 담당하는 마케팅과 운영 부서까지 모두의 편의와 생산성이 극적으로 증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겪은 시간은, 제가 커리어를 지속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지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혼자서 프로젝트의 모든 현지화 과정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제 머릿속은 불안감 대신 흥분과 명확한 이정표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내가 배운 프로세스를 그대로 이식하되, 이전 직장에서 아쉬웠던 가려운 곳까지 긁어주자.

 

행운인지 불행인지 회사 내부의 모든 결정권자들이 현지화에 관해 제 손을 들어주었고, 저는 제 입맛대로 관련 부서들과 외주사들을 한 줄로 세울 파이프라인과 툴들을 제 입맛대로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