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 공방
게임 회사 번역 일지 (5) - 너의 목소리가 보여 (3) 본문
런던 스튜디오와의 협업이 시작되자마자 제가 마주한 가장 큰 물리적 장벽은 바로 '시차'였습니다.
서울의 퇴근 시간이 런던의 업무 시작 시간이 되는 탓에, 녹음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새벽까지 모니터 앞을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3개월이라는 시한폭탄 속에서, 녹음 때문에 낮 업무인 번역과 리뷰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설계한 '병렬 워크플로우'를 유지하기 위해, 새벽에는 녹음 디렉팅을 하고 낮에는 번역 상태를 조율하며 텍스트를 검수하는 강행군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녹음의 핵심은 "번역은 기획자의 작품을 현지 시장에 맞게 전달하는 과정"이라는 저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녹음 일정에 스토리 작가님을 모시고 함께 디렉팅에 참여했습니다.
캐릭터의 숨겨진 서사와 앞으로 전개될 복선들이 성우의 목소리에 제대로 녹아들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스토리 작가님이 있어서 현장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고요.
텍스트로 볼 때는 완벽했던 문장이 성우의 입을 거치면 어색하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녹음실은 즉석에서 대본을 수정했고, 그거에 맞춰서 저도 즉석에서 번역을 수정했고, 스토리 작가님도 필요한 경우 이를 역으로 국문 텍스트에 반영하여 원문과 번역문의 일체감을 높였습니다.
특히 내부 원어민 인력이 부재하여 리뷰 단계에서 놓치기 쉬웠던 미세한 '언어 감수성'을 현지 성우들과의 소통을 통해 채워 넣으며 게임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녹음실에서는 예상치 못한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캐스팅 단계에서 고심 끝에 캐스팅한 성우님이 계셨습니다.
한 몸에 두 가지 인격을 가진 난이도 높은 캐릭터였는데, 막상 녹음이 시작되자 한쪽 인격의 표현력이 기획 의도와 너무 달랐습니다.
결국 품질을 위해 녹음본 전체를 레퍼런스로만 활용하기로 하고, 재캐스팅을 거쳐 다른 분을 고용하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다행히 스토리 작가님이 옆에 계셔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꽤 많았던 분량의 녹음도 스케줄의 밀림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분을 블라인드 캐스팅으로 결정하였기에, 주인공과 특정 NPC가 동일 인물로 매칭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인공 녹음이 이미 끝난 시점에서 발견된 이 묘한 겹침은, 두 캐릭터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마치 성우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듯한 흔적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캐릭터에 맞게 다른 연기를 해주셨지만, 정말 아쉽게도 목소리에 특징적인 부분이 있어, 목소리만 들었을 때에는 완벽하게 다른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NPC의 목소리가 캐릭터와 너무 잘 어울렸고, 그렇다고 주인공을 교체할 수는 없어 결국 교체를 포기했지만, 현지화 매니저로서 못내 아쉬움이 남는 에피소드가 되었습니다.
밤낮이 바뀐 생활 속에서 런던의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듣는 것은 분명 고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트에 무미건조하게 놓여있던 문자열들이 성우의 호흡을 타고 살아 움직이는 순간, 저는 비로소 이 시스템이 단순한 노동의 산물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비록 시차 때문에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엑셀 시트 안에서만 존재하던 캐릭터들이 비로소 입을 열어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피로가 씻겨 나가는 듯했습니다.
시스템이 공정을 효율화해주었다면, 그 끝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우리 프로젝트가 글로벌이라는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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