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번역 공방
게임 회사 번역 일지 (4) - 세상에 나쁜 번역은 없…나? 본문
'사람'이라는 블랙홀을 만나다
기획팀과의 공조를 통해 견고한 '그릇'을 만들고 나니, 이제 남은 것은 그 워크플로우 위에서 함께 '문장의 맛'을 고민할 동료가 필요했습니다.
특히 북미 시장을 정조준했던 프로젝트 특성상, 북미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저에게는 북미 시장에 대해 몸소 체득한 문화 감수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요.
그렇게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거쳐 현지 문화적 감수성이 몸에 배어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신입 사원을 채용했습니다.
면접 당시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겠다"며 반짝이던 그 뜨거운 열정은, 제가 공들여 닦아놓은 시스템의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보였습니다.
'이 파이프라인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제 나도 매일 밤 별을 보며 퇴근하는 대신 인간다운 저녁을 맞이하겠구나' 하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달콤했던 환상과 함께 말이죠.
시스템 파괴보다 무서운 '인적 병목'
하지만 실무라는 뚜껑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환상이 아닌, 시스템의 근간이 흔들리는 인재의 현장이었습니다.
제가 기획자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그토록 강조했던 String ID와 화자 정보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식에 불과했습니다.
이 정보들은 단순히 텍스트를 분류하는 꼬리표가 아니라, 이 단어가 버튼인지 타이틀인지, 혹은 어떤 성격의 캐릭터가 하는 말인지 알려주는 현지화의 유일한 내비게이션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길을 완전히 무시한 채 폭주했습니다.
부드럽고 자상한 노인 캐릭터의 입에서 뜬금없는 초딩체와 저급한 슬랭이 튀어나오는 순간, 기획자가 정성껏 구축한 서사는 처참히 붕괴되었습니다.
가장 뼈아팠던 것은 문화적 감수성의 부재였습니다.
현지화 매니저는 별생각 없이 넣은 단어 하나가 현지 플레이어의 조롱거리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출시 불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포를 늘 안고 삽니다.
유학파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기본적인 문법조차 파괴된 비문들을 보며, 저는 제가 기획자들에게 약속했던 작품을 현지 시장에 맞게 전달하는 과정이라는 본질이 퇴색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제가 만든 워크플로우는 각 공정이 제시간에 맞물려 돌아가는 병렬 처리가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낮은 퀄리티는 시스템 전체에 거대한 병목 현상을 일으켰습니다.
아무리 작은 파일이라도 그가 만진 것은 반드시 100% 전수 검수를 해야만 했습니다.
검수를 할 때마다 오역과 오타가 발견되었고, 결국 그가 번역에 쓴 시간만큼 제가 다시 재번역에 시간을 쏟아야 했습니다.
저는 기획팀과 약속했던 출시 전 번역 완료를 지키기 위해 매일 밤 별을 보며 퇴근했지만, 후속 작업 단계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그는 항상 정시 퇴근의 여유를 즐겼습니다.
신입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네가 안 가르쳐줬잖아"라는 태도를 보이며 발전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더욱 허탈했던 사실은, 그가 2년 동안 자신이 작업하던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기획자에게 질문을 아끼지 말아 달라던 저의 부탁은, 게임 화면 한 번 들여다보지 않는 무관심 앞에서 무력하게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허무한 엔딩
놀랍게도 이 동행은 다른 동료들이 들어와 그의 업무 공백을 메우기도 하며 2년이나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담당 프로젝트가 변경되면서 한사람 한사람의 퀄리티업이 부서 전체의 생존 전략이 된 상황이 왔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제는 정말 같이 노력해서 수준을 높여보자"고 진지하게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며칠 뒤 퇴사하는 것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시스템은 노동을 줄여주지만, 책임감까지 복사해주지는 않는다
시스템을 이식한다는 것은 단순히 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표를 가진 팀으로서 신뢰를 쌓는 과정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파이프라인을 만들어도, 그 안을 흐르는 데이터가 오염되어 있다면 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세상에 나쁜 번역은 없다"고 믿고 싶었지만, "세상에 나쁜 번역가는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로컬라이제이션 매니저의 진짜 고충은 엑셀 시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트를 채우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매니징하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저는 다시 한번 밤하늘의 별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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